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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 가정의 아버지로 살아간다는 것...김병한 씨와 함께한 술자리

끄적끄적끄으적 2023. 5. 30. 15:36

 

김병한 씨가 아들의 졸업식에서 졸업 가운을 입은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흔히들 부모님을 생각한다.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 모습부터 알고 있으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정작 우리는 부모님을 잘 알지 못한다. 부모님은 우리가 본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았다. 알지 못하는 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부모님의 인생을 속속들이 물어볼 만한 기회도 좀처럼 없다.

 

인터뷰 주제가 부모님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과연 아버지를 얼마나 아는지 되물어 보았다. 솔직히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는 아버지를 알아가는 기회로 삼았다.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에게 그간 묻지 못한 것을 묻고자 했다. 아버지가 일찍 끝나는 수요일, 부자(父子)는 동네 식당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였다.

 

기구했던 어린 시절

60대 직장인 김병한 씨는 1963년 홍천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산골짜기다. 주변에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터널이 생기기 전까지는 해발 고도 1,089m의 운두령 고개를 지나야 했다. 그의 고향을 갈 때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도로 때문에 기어이 구토할 때가 많았다. 운두령을 지날 때면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서 검은 봉투를 준비해야 했다. 그는 가파르게 돌아가는 고개를 수동 기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운전했다.

 

험한 고개를 넘어 도착한 홍천에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 할아버지다. 나는 할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나뿐만이 아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모른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태어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내 생일이 3월이고 아버지 돌아가신 게 8~9월쯤이래. 가을 운동회 때 돌아가셨어. 씨름 경기를 하다가 머리를 크게 다치셨대. 나도 아버지 얼굴을 전혀 몰라. 너희 엄마가 꿈에서 본 적이 있다는데 첫째 큰아버지를 닮았다더라.”

 

그는 아버지 없이 자랐다. 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었기 때문에 몇 년 뒤 새로운 남편을 만났다. 그분은 목수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새아버지를 둔 시간이 힘들지 않았을지 물어 봤다.

 

“글쎄…. 나도 아침 일찍 나가서 학교 다녀오고 그분도 워낙 일을 많이 해서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어. 다녀왔습니다, 이런 인사는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새아버지를 잘 알지 못했다. 더 물어보아도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대신 이부형제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세 살 위 누나와 아버지, 그리고 몇 년 뒤에 태어난 쌍둥이 동생이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술을 마시던 중 아버지는 뜻밖의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때는 다들 가난했잖아. 우리 집은 아이가 많았지. 내 위로 형이 세 명, 누나가 두 명, 이렇게 육 남매였어. 거기에 쌍둥이 동생이 태어난 거야. 그 중 한 명은 갓난아기일 때 다른 집으로 입양을 보냈어.”

 

고모와 작은아버지는 쌍둥이다. 아버지 집안 사정이 넉넉지 못했고 이미 형제는 많았다. 할머니는 경제적인 형편 때문에 고모를 다른 집으로 입양 보냈다. 아버지 역시 어릴 때라 잘 알지 못했다. 고모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90년대의 일이었다. 고모도, 할머니도 서로를 열심히 찾았고, 운 좋게 만날 수 있었다. 그 이후 고모는 아버지 가족과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오래 전 대부도에서 찍었던 사진 속 김병한 씨와 본인 [사진=김호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가 없었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다. 그는 나를 키울 때 말이 별로 없었다. 나와 형을 혼내는 사람은 대부분 어머니였다. 그는 그저 지켜보는 편이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없어서 자식을 키우는 일에 서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물어봤다. “사실 나는 너희를 돌볼 시간이 별로 없었어. 거의 네 엄마가 키웠지. 그때는 주 5일제도 없어서 토요일까지 일했어. 한 달에 두 번은 쉬었나? 그러니 아빠는 아침 일찍 나갔다가 늦게 돌아와서 너희가 자는 모습을 많이 봤지. 그래서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고민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

김병한 씨는 지금도 아침 일찍 나가서 가족 중 제일 늦게 들어온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잠든 가족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히 출근 준비를 한다. 그 누구도 그의 출근을 배웅하지 못한다. 집에 제일 늦게 들어온 그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한두 시간 뒤 바로 잠에 든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그에게 얼마 되지 않았다.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삶은 변한 것이 없었다.

 

대신에 그는 명절이나 연휴 때면 잊지 않고 꼭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 정 시간이 없으면 할머니 댁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잠깐의 시간이라도 활용했다. 덕분에 우리 집은 가족여행 사진이 많다. 가족여행을 생각하면 피곤함을 이기며 운전대를 잡은 채 5시간이 넘는 거리를 묵묵히 운전하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버지가 가족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말보다 행동이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사람들을 책임지는 일을 맡을 때면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도 오랜 시간 가정을 돌보며 말 못 할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순간이 찾아와도 그는 말이 없었다. 피곤하다고 투덜거리는 모습조차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회사가 부도나서 몇 달째 월급을 받지 못하던 시절에도 가족에게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가 가장의 무게를 견디는 방법이 궁금했다. “내 문제는 내가 스스로 삭히는 거지, 뭐. 그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 해도 모두가 공감해줄 수 없어. 설령 네 절친이라도 해도 그럴 수 없을 거야. 나도 친구에게 그렇게 못해.”

 

그는 그 무게를 오롯이 혼자서 감내하려고 했다. 나도 책임감과 부담감이 짓누를 때면 혼자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힘들다 해도 얼굴 위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알게 모르게 닮아 있었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미련한 성격까지 똑 닮았다.


 
 
지난해 여름에 찍은 사진. 김병한 씨가 아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병한 씨 제공]

인터뷰를 마친 후 김병한 씨에게 앞으로 꿈꾸는 삶을 물어봤다. 그는 나와 형이 독립하기 전까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말로 첫마디를 떼었다. 이어 어머니와 시골에서 오붓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환갑이 된 지금까지도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그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아버지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정을 꾸린 이후에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느라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렇게 60년을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자신보다 가족이 더 중요했다.

 

그래도 그는 행복했다. 술을 다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김병한 씨는 불콰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 시간 되면 인터뷰 아니어도 좋으니 한 달에 한 번쯤은 술 한 잔 기울이며 떠들자고 말했다. 그는 "좋지!" 라며 밝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술에 취해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집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술 때문이었을까 밤공기가 참 따뜻했다.

 

 

<한국잡지교육원_취재기자24기_김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