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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래 입어야 예쁘다…웨어하우스의 청바지 Lot 1001의 속 이야기

끄적끄적끄으적 2023. 4. 13. 15:46

청바지는 ‘데님(Denim)’이라는 인디고로 염색한 트윌 섬유로 만든다. 인디고는 흔히 남색이라 부르는 색상으로 원료로 쓰이는 식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트윌은 실을 두 올 또는 그 이상으로 꼬아서 만든 원단이다. 데님을 풀어서 말하면 남색으로 염색한, 실을 두 올 이상 꼬아서 만든 원단이다.

청바지는 튼튼한 트윌 섬유로 만들었기에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막 입을 수 있어서 작업복으로 쓰이던 옷이다. 작업복이었던 청바지는 <위험한 질주>(1953)와 <이유 없는 반항>(1955)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젊음과 반항의 상징으로 변화했다.

 

오랜 세월 속에 청바지는 많은 변화를 거쳤다. 70년대에 캘빈 클라인(Calvin Klein)이 세련된 청바지를 내놓았고, 90년대는 힙합의 영향으로 헐렁한 청바지가 인기를 누렸다. 2000년대에는 디자이너가 만드는 프리미엄 청바지가 등장했다. 활동성을 더하고자 스판덱스를 넣은 청바지도, 보온 효과를 위해 기모를 덧댄 청바지도 나왔다.

 

다양한 청바지의 유행 속에서 시대를 거스르는 옷도 등장했다. 이쪽은 원형으로의 회귀를 추구했다. 작업복으로 쓰이던 시절의 청바지는 투박하고 빳빳했는데, 이 느낌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청바지의 본고장 미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말이다. 청바지 마니아는 오사카나 도쿄의 빈티지 옷 가게에서 중고 리바이스를 찾았다. 미국에서 팔리지 않아 악성 재고로 남은 청바지가 일본으로 들어왔다.

 

오래전부터 데님을 만들던 미국의 콘 밀스가 데님 생산을 중단하며 거친 매력의 청바지를 구하기 힘들어졌다. 그러자 마니아들은 일본에서 직접 청바지를 만들었다. 그들은 일본에 남은 구형 기계를 사용해 중고 리바이스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유니클로의 저렴한 청바지가 나오며 경쟁이 불가능해지자 오히려 특별한 청바지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80~90년대 일본에 빈티지 레플리카 청바지 브랜드가 자리 잡았다. 오늘 소개하는 웨어하우스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회사다.

 


 

웨어하우스는 1995년 시오타니 겐이치와 시오타니 고지 형제가 설립한 회사다. 이곳은 빈티지 청바지를 복각하는 데 집중한다. 모든 설비와 제작 과정에서 예전 기계와 방식을 사용하고, 심지어 옛날 옷을 가져다 해체하고 분석해 재현한다. 세세한 디테일을 신경 쓰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Lot 1001은 웨어하우스에서 처음 내놓은 청바지로 웨어하우스의 대표 모델이다. 구리 리벳, 사슴 가죽 패치 등 청바지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충실한 제품이다. 이 제품은 17년 여름에 스컬프 스토어에서 구입해 올해까지 6년 째 입고 있다. 비싼 바지다. 당시 20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샀다.

 

웨어하우스 홈페이지에 가져온 상품 사진(좌)과 6년 입은 LOT 1001의 모습(우)

위 사진은 각각 새 옷과 6년 입은 옷이다. 조명과 여러 상태를 차치해도 둘 사이의 현저한 색상 차이가 보인다. 변화의 비밀은 '로 데님(Raw Denim)'이다. 로 데님은 가공하지 않은 상태의 데님을 말한다. 가공하지 않은 상태? 우리가 입는 청바지는 가공한 상태인 건가? 맞다. 시중에서 입을 수 있는 대부분의 청바지는 더 이상 수축하지 않도록 후처리가 돼 있다. 데님은 옷으로 쓰기에 좋은 소재가 아니다. 기껏 만들어도 세탁하면 옷이 줄어들어서 정확한 옷 사이즈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가공되지 않은 청바지를 찾는 사람도 있다. 이유가 멋진 워싱에 있다.

우선, 로 데님의 세부 구분을 살펴보자. 로 데님은 크게 언샌포라이즈드(Unsanforized)와 샌포라이즈드(Sanforized)로 나뉜다. 둘은 후처리 여부가 기준이다. 언샌포라이즈드는 아무런 처리를 하지 않아 크게 줄어들고, 샌포라이즈드는 살짝(약 2~3%) 줄어든다. 줄어드는 정도가 적은 샌포라이즈드가 더 발달한 기술이지만, 언샌포라이즈드를 더 선호하는 마니아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보다 원초적인 상태의 청바지이기 때문이다. 청바지는 마찰이 생기면 색이 빠지는데 이 과정에서 워싱이라 불리는 무늬가 생긴다. 모든 청바지에 다 워싱이 있지만 언샌포라이즈드는 워싱을 더욱 극적으로 즐길 수 있다.

 

Lot 1001은 언샌포라이즈드 제품이다. 구입한 후 소킹(Soaking) 과정을 거쳐서 내 취향에 맞게 사이즈를 조절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언샌포라이즈드는 사이즈 변동이 심하다. 매장에서 34 사이즈 제품을 구입한다고 내가 34 사이즈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사실이다. 세탁하면 사이즈가 줄어들기 때문에 내가 평소 입는 사이즈보다 2 사이즈 정도 큰 옷을 사야 한다. 심지어 같은 사이즈의 옷인데도 1cm 정도의 차이가 발생할 수도 있다. 데님은 정말 옷으로 쓰기 적당한 소재가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청바지 브랜드는 원 워시(One Wash) 버전, 즉 한 번 세탁해 줄어든 제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처음 Lot 1001의 색깔은 짙은 남색이다. 게다가 아주 빳-빳하다. 가공을 하지 않아 풀을 먹인 것처럼 반짝거리고, 입으면 이걸 사람이 입으라고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불편하다. 로 데님을 세탁해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바꾸는 과정이 (앞서 언급된) 소킹이다. 기본적으로 따뜻한 물에 20분~1시간 정도 담갔다가 세탁기에 돌리고 건조한다. 남색을 잘 살리기 위해 소금과 식초를 넣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그저 기본이다. 기괴한(?) 청바지 마니아의 세계는 다양한 사람과 그만큼 많은 방법이 존재한다. 수축을 크게 만들기 위해서 고온 건조기를 사용하는 사람, 수축을 줄이기 위해 찬물에 담그는 사람도 있다. 소킹을 안 한 채로 몇 년씩 입고, 다시 말해 세탁하지 않고(...) 몇 년을 입으며 청바지에 자신만의 무늬를 남기는 사람까지도 있다. 나는 무난하게 살고 싶어 화장실 욕조를 사용했다.

 

Lot 1001의 단추(좌)와 사슴 가죽으로 만든 패치(우).

 

수축을 대비하기 위해 Lot 1001 같은 언샌포라이즈드 청바지는 지퍼가 아니라 단추가 달렸다. 지퍼는 수축 시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청바지의 원형은 단추가 있었기에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로 데님만의 매력이지만 실생활에서는 불편하다. 화장실에서 이것 때문에 귀찮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6년을 봤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이 바지를 보고 왜 저렇게 생겼는지 물어보곤 한다.

 

가죽으로 만든 패치도 특징이다. 시중의 여러 청바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가죽이 아니라 다른 옷감으로 만들었다. 이 패치의 매력은 오랜 세월 뒤에 느낄 수 있다. 보다시피 여러 번의 세탁으로 글자가 지워지고 가죽이 쭈글쭈글해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도리어 빈티지한 느낌이 오롯이 느껴진다. 벨트를 착용해 평소에 다른 사람은 보기 힘들다. 이 즐거움은 오직 나만 볼 수 있다는 함정이 있다.

스마트폰을 자주 넣어 가장자리를 따라서 워싱이 생겼다. Lot 1001은 입는 사람의 일상에 따라 각기 다른 워싱이 나타난다.

웨어하우스 Lot 1001의 매력은 일반인이 느끼기 어렵다. 옛날 옷을 그대로 만들어 불편함을 즐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비싸다. 하지만 이 옷과 오랜 세월 함께하면 어떤 옷에서도 느낄 수 없는 멋을 즐길 수 있다. 내 일상이 청바지의 워싱으로 담기고 빳빳하던 옷이 부드럽게 변하는 과정은 Lot 1001을 입는 사람이 누리는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웨어하우스도 그 점을 아는지 청바지(또는 청자켓)를 오래 입은 사람의 자료를 받아서 아카이브로 남긴다(https://warehouse-labo.tumblr.com/). 찢어지고 망가진 부분을 수선해 10년 넘게 입은 청바지를 보면 단순한 옷이 아니라 인생이 담긴 하나의 추억이라 해도 될 정도다.

 

웨어하우스의 아카이브 사이트. 낡은 청바지가 여럿 보인다.

SPA의 등장으로 유행이 더욱 빨라졌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옷 한 벌을 사서 오래 입기보다 저렴한 옷을 여러 번 바꿔 입는 방향으로 변했다. 빠른 유행의 시대에 청바지 한 벌을 10년 넘게 두고두고 입는 모습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옷의 즐거움은 새로움에만 있지 않다. 오랜 세월을 거쳐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옷을 만나는 즐거움은 어떨까? 빈티지 청바지가 일본에서 오래 살아 남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